존 넬슨 다비의 새번역 신약성경 - 다비역 성경

존 넬슨 다비 지음 | 이종수 옮김 | 출판사 : 형제들의 집

가 격 : 35,000원

출간일 : 2021-2-21 | ISBN(13) : 979-11-90439-10-7

신국판| 836쪽| 153*225mm

  

존 넬슨 다비의 새번역 신약성경

The Holy Scriptures : A New Translation from the Original Language by J. N. Darby 1871

다비역 성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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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 대한 서문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성한 빛의 응집성과 확장성,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가진 광대한 중요성

이 신약성경을 주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필자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긴 했지만 또 한편으론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이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에 담긴 거룩한 빛의 응집성과 동시에 확장성을 밝히며, 그 속에 담긴 진리들의 방대한 범위, 동일한 구절이 지닌 다양한 측면과 이를 바르게 적용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 구절이 거룩한 진리들의 전체 영역과 지니는 관계성 등, 그 자체로 고려되든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나 인간의 필요와 관련하여 고려되든 이러한 진리들이 지니는 엄청난 중요성, 그 진리들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또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식 등등 - 필자로서는 불완전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모든 사실들로 인해서 겸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신약성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목적에 대한 (원리에 있어서도) 참되고도 적절한 통찰을 제시해 보려는 나름대로의 자만심을 버리게 된다. 아울러 진리 그 자체가 계시되면 될수록, 그 참된 빛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더욱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무력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완전한 것을 혹 어둡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더욱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행해야 할 진리가 (여기서는 진리 자체가) 순결하면 할수록 그 순결함을 어떤 면으로든 훼손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제시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며, 만일 어떤 식으로든 진리가 훼손된다면 그로 인해 입는 상처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러 저러한 구절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신성한 빛의 정도(measure of light)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전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 대한 통찰을 제시해보려 할 때는 진리 자체의 모든 완전함과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나타내신 계시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의 우주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진실하면서도 일반적인 통찰을 제시하는 과업을 떠맡았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심

아마 어떤 이들에게 구약성경은 신약성경보다 더 어렵게 보일 것이며, 다소 고립되어 보이는 구절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비록 구약성경을 기록한 영감 받은 기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리고 거기에 지혜가 드러나 있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여전히 휘장 뒤에 숨어계셨다. 우리는 말씀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하신이가 하나님이신 까닭에 손실을 당한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다만 말씀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나타나신다.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서에서 이 땅에 온유하고 인자하신 사람으로서 나타나셨고, 성령의 교통 안에서 신성한 빛을 비추시면서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나타나신 것은 여전히 하나님자신이시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개인사의 인도를 구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면, 이러한 생생한 계시들을 잘못 해석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진리 자체인양 꾸미는 심각한 과오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진리 자체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 그리스도는 참된 사람이면서 또한 아버지를 나타내신, 아들의 위격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의 성취를 통해 구약은 퇴색되고, 이제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이 소개됨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 , 영원한 생명 등은 해석상 너무도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제는 더욱 커진다. 따라서 진리는 그 자체가 지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따라 접근할 때에만 관찰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의 나타남으로, 혹은 아들의 영광과 관련된 하나님의 속성의 나타남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구약성경의 부분적인 계시들과 관련하여 상호 연계성과 상호 대조성을 볼 수 있다. 신약의 진리는 하나님의 지상적인 통치(government)에 대한 경륜과 관련해서 구약성경을 성취시키고 또 신약의 진리가 내뿜는 그 광채로 구약성경을 퇴색시킨다. 이제 하나님의 지상 통치의 경륜은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을 소개하기 위하여 옆으로 제쳐졌다. 이것은 사람과 관련해서 고려될 수 있는데, 이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그 자신을 나타내고 영화롭게 하고, 사람에게 그 자신을 알리고, 그리고 사람을 다른 지적인 피조물들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으로 세우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각 구절들에는 이런 사실들과 관련하여 말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진리가 하나이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모든 만물 위에 비추어 그것들의 참된 속성을 드러낸다.

순수하고 살아 있는 물이 흐르는 관

두 가지 사실이 마음을 북돋운다. 첫째, 우리로 유익을 얻도록 그 놀라운 계시들을 허락하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God of perfect goodness)이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비록 진리의 근원이 무한하고 완전할지라도, 이 계시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의 충만함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일을 행하신 분의 완전함을 좇아 진리가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여러 도구들을 수단으로 해서,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의 이러저러한 부분을 전달하는데 사용하시는 정해진 용량만큼만 전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수하고 살아있는 물(말씀)은 전혀 더럽혀지지 않았으나 그 전달과정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제한을 받았고, 그것을 전달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신 통로 역할을 한 사람도 모든 진리를 전달하신 분의 온전한 지혜를 따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분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통로 자체는 무한하지 않았다. 그것을 지나 흐르는 물은 무한했지만 그 물이 흐르는 통로는 무한하지가 않았다. 성경 기자들은 부분적으로 예언했으며, 우리도 부분적으로 안다. 진리적인 측면과 그 적용은 그것이 전달되는 통로(또는 사람)에 따라 어떤 특별한 성격을 지니기까지 한다. 생명수가 그 온전히 순수한 형태로 그곳에 있다. 그 원천이 존재하는 중심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생명수가 사람들 앞으로 흘러나오는 그 샘의 모습이나 형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정하신 목적을 따라, 곧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갖추어진다. 성령님은 사람 안에서, 그 목적을 위해서 예비된 그릇 안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진리와 관계된 이러저러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예비한 그릇을 도덕적, 지적으로 창조하고, 형성하고, 빚고, 적합케 하신다. 하나님은 예비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셨고 또 여전히 진리이시다. 다른 사람들은 다만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음과 생각을 조화롭게 이끄신 요소들과 관련하여, 그리고 성령께서 그와 같이 자신을 준비시키신 그 목적을 따라서 진리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제 두려움을 뒤로 한 채 우리를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선하심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서 이 소중한 사역을 감히 감당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막중한 책임감을 시종일관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은 어떤 것도 일절 시도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주님께서 친히 은혜로 가르쳐 주사 독자들에게 축복이 될 만한 깨우침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신약성경의 특징: 사람 가운데 인자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신약성경은 분명히 구약성경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이러한 차이의 본질을 말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revelation of God Himself)을 다루며, 또한 사람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 존전에 이르는 영광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에는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고 심판을 행하셨다. 그때에 하나님은 지상에서 하나의 민족을 다스리고 또 주변의 열방을 섭리하시는 중에, 이 이스라엘 민족을 소유하심으로써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또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해 줄 그분의 오심을, 시대를 거듭할수록 선포되는 점증하는 빛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통해서, 즉 사람들 가운데 오신 인자의 출현을 통해서 모든 것의 위치를 변화시켰다. 즉 인간은 모든 악을 멸하고 모든 선한 요소를 계발, 완성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모든 관심(affections)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한 분이신 인자를 축복과 영광의 면류관으로 영접하든, 아니면 우리의 가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야만 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운 피조물의 기초와 토대가 되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거절한 인간의 선택이 만물의 질서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됨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내를 보이신 후에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셔야만 했다. , 슬프게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는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또한 말씀하셔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수단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거절할 때까지는 인간을 거절하고자 하지 않으셨다. (에덴 동산의 경우에 죄를 알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견딜 수 없게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에 하나님은 그를 동산 밖으로 추방시키셨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 하나님이 자비로 인간의 불행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시는 것을 완전히 거절한 이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자유롭게 - 외람된 표현 같지만, 그러나 이 표현은 도덕적으로 옳은 표현이다 - 실행에 옮기실 수 있었다. 일찍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버린 에덴의 경우가 그렇듯이 이것은 심판이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명백히 잃어버린바 되었고 또 스스로 하나님의 대적으로 자처했을 때, 하나님을 거절한 가련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통해서 온 우주 앞에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주권적인 은혜가 실행되는 것이다.1)

1) 디도서 1:2, 디모데후서 1:9,10을 보고, 잠언 8:22-31, 특히 30, 31절과 로마서 16:25,26, 에베소서 3:5,10, 그리고 골로새서 1:26절을 비교해보라.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오시거나 인간이 들어갈 수 없었다.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은 오시고, 인간은 들어간다. 이러한 것들이 율법과 복음의 본질이다. 그 사이에 약속이 있었다. 이것이 둘 사이의 관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그 모든 세세한 부분에까지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자신을 계시하신 이러한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계시된 이전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적절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또한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섭리가 가진 완전한 지위 조차도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 아래로 흡수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약성경의 네 가지 중요한 주제

이 모든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 놀라운 책에서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위대한 주제와는 별도로)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네 개의 주제를 발견한다.

첫째로, 전체를 지배하는 위대한 사실이자 또한 주제는 완전한 빛이 나타났다는 것, 곧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이 빛은, 하나님이 가지신 다른 근본적인 이름인 사랑 안에서 나타났다.

이 빛과 사랑의 나타남이신 그리스도, 또한 영접만 되셨더라면 모든 약속을 성취하셨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특히 (책임의 측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인격적이고 도덕적이고 또 권능 있는 모든 증거들이, 곧 그들이 결코 핑계치 못할 증거들을 통해서 제시되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거절된 까닭에 (그 거절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었다) 만물의 새로운 질서 - 인간이 영화롭게 되고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영광을 누리게 된 것 - 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셋째로, 지상에 대한 만물의 옛 질서와 율법과 약속들, 선지자들, 혹은 지상에 세운 거룩한 제도들과 관련 있는 새로운 질서 간의 관계가 드러났다. 이는 낡은 것이 되어 버린 질서를 옆으로 제쳐둠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옛 질서의 성취로 드러내고, 그리고 두 질서 간의 대조와,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진술함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하나님 편에서 세상의 통치가 예언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심판에 의해서든 축복에 의해서든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된 일이, 메시아를 거절함으로써 옛 언약 관계가 결렬된 일과 관련하여, 간략하면서도 분명히 진술되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의 목적들을 권능으로 이루실 때까지 이 땅의 나그네로 지낼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풍성하게 공급되었다는 점을 부연할 수 있다. 거절되고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나오라는 복음의 외침이 선포되었다. 비록 하나님이 이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하신 기업을 아직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이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은 자신을 지도하고, 또 그 소명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의 원천과 그러한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계시해줄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거절한 주인을 좇도록 부르실 때에 그 길에서 그를 인도하고 격려하는데 필요한, 그리고 그에게 능력의 원천과 그것을 얻는 비결을 가르쳐주는데 필요한 모든 빛과 모든 지침을 공급해 주시는 일에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

성경을 대하는 모든 독자들은 이러한 주제들이 신약성경에서 별도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주제들은 훨씬 덜 완전하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 주제들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든 혹은 영감받은 성경기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것이든, 생명과 능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구분과 각각의 주제들

복음서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빛과 은혜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리고 교리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으로, 또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목적들이 성취되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본래 그들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 자들로 만들어버리신 신성한 위격을 가진 분으로 공개적으로 제시한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을 소개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계시된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는 통치의 자리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아래 들어가게 된 책임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 서신서들은 구속, 곧 새로운 창조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 사실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인 교회를 계시해 준다. 이러한 주제들과 연결된 다양한 주제들이 서신서 곳곳에서 발견되며, 그 주제들 하나 하나의 발전은 나머지 모든 주제에 빛을 던져 준다. 여기에 더하여, 요한 서신서들은 특히 하나님의 나타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나타남, 그리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인간 안의 새로운 생명 - 이 둘은 서로 일치하므로 - 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베드로의 서신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순례자의 삶과,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덕적인 원리(of the moral government of the world)에 대해서 다룬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현시를 통해서 빛나는 진리,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 생생한 적용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든 아니면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든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빛이었기에) 진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나타남(the living manifestation of God)과 거듭난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생명 속으로의 적용을 통해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에게 전달되고 특별한 필요에 적용될 때, 그리고 전달된 사람들의 영적인 자질들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진리 고유의 속성인 점진적인 발전2)과 관계가 있다.

2)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신약성경에 계시된 진리임을 확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 이후, 이렇게 계시적인 방식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계시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했다. 하나님은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신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도 또한 진리로 거룩함을 얻도록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것들을 가지신 성령님은 그것들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모든 진리 가운데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이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알릴 것을 말씀하셨다(16:14,15 참조).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신성의 모든 충만”(2:9) 보다 더 충만한 것이 있는가? “아버지께 있는 것”(16:15) 보다 더 큰 것이 있는가? “참 빛”(1:9, 요일 2:8) 보다 더 밝은 빛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계시된 내용들이다. 거미가 자기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듯이, 사람은 마치 자신에게서 새로운 생각이 샘솟듯이 생각에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요점이 이미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할 때, 진리의 본질 또는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확장될 수 없다.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것 밖에선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계시를 통해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이 발전되어 온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었고(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계시를 이해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연관이 있었다. 세례 요한 시대부터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계시 -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계시 - 가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에는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충만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진리에는 아무 것도 발전될 여지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양 젠체하는 인간의 허세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신약의 계시들은 분명 모든 시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그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상태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달된 진리를 어떤 면으로든 약화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며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순전한 포도주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아니했으며, 그 질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가 받은 대로3) 그대로 순전하게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3) 이에 대한 다음의 고린도전서 2장의 진술은 매우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구약성경의 기록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것은 계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이것은 계시가 전달되는 방법, 즉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을 가리킨다. 그리고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다. 이것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방법 또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계시, 영감받은 증거, 그리고 오직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계시를 받아들이는 방법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여기 고린도전서 2장에서 독특하게 확증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효력과 말씀의 권위

인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추상적인 진리보다는 훨씬 위대한 실재를 지닌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말씀은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사상이나, 심지어는 그 주제에 대해 진리를 가지고 인간이 사유한 결과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는 인간이 판단하거나, 또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맡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고 또 친히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또한 자신의 생각들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전달하시는 분이시다. 만일 인간이 말씀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진리를 소유하고 또 말씀의 권위를 소유하도록 인간에게 미친 영향이, 종종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와 말씀 자체를 서로 혼동하도록 오해를 일으켜 왔다. 말씀은 그런 식으로는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다. 그렇게 하면 말씀 그 자체의 속성을 부인하는 셈이 되고, 또한 말씀하시는 이가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그 자체로 권위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없다.

말씀은 인간의 본성에 적용된다. 그렇게 말씀은 인간의 본성에 적용됨으로써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삶의 다양한 모습 속에 도덕적·영적 빛을 비춘다. 따라서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사물 자체에는 가시적인 변화가 없어 보일지라도, 어떤 효능이 사물의 속성에 적용됨에 따라 미치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를 낳게 된다. 모든 화학 작용이 이러하다. 만일 내가 어떤 의약품을 복용한다면, 나는 그 효능을 경험한다. 의약품은 나의 본성에 따라서 작용하는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나는 의약품이 가지고 있는 효능과 능력을 확신한다. 이것은 내 능력에 따라 그 약품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신 그리스도의 계시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인간의 악한 의지가 말씀의 계시를 반대하고 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이런 경우에는 말씀이 주는 은혜와 효력을 얻기 보다는 엄청난 재앙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정해진 효력과 결과를 낳을 때 결코 판단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판단)한다(4:12).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도록 설정된 역사적인 상황이나 환경들

인간이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런 경우에 말씀이 전달된 사람들이 처한 역사적 또는 환경적인 상황은, 현재 묵상 중에 있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심중에 담긴 의도를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 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상황들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순전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처한 상태(또는 상황)에 따라서 말씀하시므로, 말씀 안에 설정되어 있는 상황들은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된다. 이러한 상태 자체는 다만 말씀에 의해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해된다. 때때로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인간의 마음의 악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의 심중에까지 미치는 말씀의 빛과 그 상태에 따른 적용

어찌하든지 은혜는 인간의 상태4)에 따라서, 친히 하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라서, 그리고 이미 가르치신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서 인간에게 전달된다. 이 말은 세상에 온 참 빛인 이 빛이 어두움에 적응하기 위해 흐려지거나 광도가 낮아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이 아닐 것이며, 인간이 처한 상태에서 인간을 건져냄으로써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 것이다. 말씀은 사람들의 깊은 심중에까지 미치며, 또한 그들의 상태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전달된다. 바로 그런 것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을 직접 들었던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상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된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에 늘 신실하셨던)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회심했지만 여전히 유대 종교 체제에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또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제쳐두고, 천상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이 가져온 모든 결과들을 성령님을 통해 전달하실 수도 있으셨다. 아울러 이러한 천상으로의 승격(heavenly elevation)과는 반대로 세상적인 요소들을 의지하고 있는 영혼들, 그리고 자신들을 이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성향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진리의 말씀을 붙들지 않는 영혼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빠져들고 있는 그 죄악의 증거들을 드러내 보이실 수도 있으셨다. 그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들과의 연합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수단을 통해서 주님이 하시는 이 일은, 비록 초보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의 고도(高度)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늘상 발견되는 이러한 육신적인 성향을 판단하게 해준다. 아니면 성령님은 그에 합당한 수준에서 한결 단순하게 진리를 드러내신다. 성령님은 가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그리스도인인체 하지만, 실상은 가장 단순한 부분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거스려 죄를 범하는 모든 이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의 본질적인 특질들을 강조하셔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미숙한 영혼들조차도 하나님의 속성의 본질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가장 존귀한 특질들과 연결된 존재임을 드러내셨다.

4) 하나님은 은혜로 죄악 가운데로 오셨고, 은혜는 인간을 은혜에 적합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은혜는 다만 하나님을 계시할 뿐이지만, 죄악 뿐인 인간을 은혜에 합당한 존재가 되게 해준다. 따라서 은혜는 순수하게 천상적이고 신성한 것을 내어주면서, 또 그렇게 더욱 역사하면서 비록 악의 한 가운데서도 그렇게 변화시킨다. 은혜는 하나님을 장차 하늘에서 알려지실 그대로 계시하지만, 그 작용의 사실에 대해선 지상적인 낙원이나 혹은 천상적인 낙원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 이 땅에서 악의 한 가운데서 선으로 나타났다. 천사들도 이것을 살펴보기를 원하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최고최상의 수준으로 이끌어주긴 하지만 단순한 선으로는 이룰 수 없는, 주권, 은혜, 그리고 지혜에 속한 것이다.

신성한 진리를 이해함, 그리고 실제적인 진리를 영혼 속에서 실현함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러한 사실들이 발견되는 성경 자체에서 이끌어낸)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기록된 그 안에 포함된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운동력 있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영혼 속에 실현가능한, 적용되는 진리이자 실제적인 진리다. 이러한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성경이 경계하고 있는 죄악에 빠지도록 이끄는 마음의 육신적인 성향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보호해준다. 우리에게 임하는 진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증거되어야 한다. 행여 진리 자체를 우리에게 적응시키기 위해 그 성격을 변경시키거나 또는 우리의 상태에 맞추어 형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그 내려오는 근원으로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임하며, 또한 진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전해진 진리는 거룩한 속성의 높은 표준에까지 우리를 도덕적으로 높이 들어올리기 위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이렇게 참 빛이 비추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신 결과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이러한 진리는, 즉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의 상황에 적용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아는 지식으로 이끌어 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자신의 속성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듯이, 이 모든 섭리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와 지혜와 주권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섭리의 중심이시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가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래서 자리를 잡고 있다. 천사들, 정사들, 권세들, 유대인, 이방인 및 모든 이름들이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미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제 우리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의 으뜸 되심과 연관되어 있는 많은 주제들이, 엄격히 말해서 구원을 제외하고, 우리의 교훈(instruction)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성경의 교훈들은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와 조화를 드러내고 있는 신약성경

이와 같이 비록 유대인과 관련된 하나님의 생각들(intentions)이 자연스럽게 구약성경에서 더욱 발전되어 있지만, 그들의 역사가 신약의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상, 옛 경륜에서 새로운 경륜으로의 역사적인 전환과 유대인에 대한 약속과 복음 경륜의 보편성과의 조화 등 이 모든 주제들은,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알려져야 한다면, 반드시 신약에 위치해야만 한다. 여기서 강조하고픈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우리는 유대인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행동을 하고 또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비록 충만한 빛이 신약성경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서 유대인들과 또 그 민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각각 증거된, 또한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발견한다. 이러한 계시들이 없다면, 또는 이러한 교훈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처했던 독특한 상황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아무런 조화도 찾을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거나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은 교리에도,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고 소개되신 역사에도, 예언에도 적용이 된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을 보여준다.

하나님 자신이 알려지고, 기뻐하고, 영광을 받으심

우리가 하나님, 곧 이 세상사에 관여하기 위해 내려오신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단순한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알려지셔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 안에 계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뿐만 아니라, 이것이 본질적이고 주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완전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계시하셔야만 했다. 그처럼 세세한 사항들을 통해서 우리의 작고 좁은 마음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오래참고 또 겸비하신 사랑을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의 추상적인 개념들이 그처럼 세세한 사항들을 통해서 발전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우리의 제한된 지성은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제한된 지성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실현된 하나님의 지혜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선견지명을 완전히 초월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써,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 안에서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과 연결시키기를 기뻐하셨으니 그분의 미약한 피조물에겐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지각없고 편협하고 심지어 그 모든 주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어리석은) 철학은 하나님 같이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 인간과 같이 무력한 존재에게, 즉 광활한 우주 속의 한 점에 불과한 존재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세상이 너무 좁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물질영역과 도덕영역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를 시도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논리이다! 연극 무대의 모든 장치들이 연기자들의 연기력(도덕성)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설정한 것이듯,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을 무대로 해서 모든 지적인 존재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지각과 능력을 받게 되고, 또한 이상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이것은 우리에 의해서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또한 모든 만물에게도 참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순하고 겸손할수록 우리는 이처럼 영광스런 지위를 더욱 깨닫게 된다. 장차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알게 될 것이다. 그 동안은 더욱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우리의 분깃과 우리의 관심사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닮게 된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셨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신약성경에 계시된 진리들의 순서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의 내용, 혹은 그 안에 담긴 진리들이 계시되고 있는 순서의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신약성경의 책들이 일반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순서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5), 우리는 그 순서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신약성경이 가지고 있는 순서상 첫 번째 주제는 사복음서에 담긴 주 예수님 자신의 역사(歷史)와 위격(位格)이다.

5) 몇 개의 로마 가톨릭 버전을 포함해서 독일 성경들과 여러 사본들은 그 순서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는 신약성경의 순서와 각 성경이 담고 있는 계시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주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뒤따른 교회의 시작과 복음전파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사도행전에 담겨 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의 전개와 각 교회와 개개인에게 베풀어진 사도들의 목회적 돌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주님을 영화롭게 할 행보에 필요한 지침들,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원수에 의해 시도된 다양한 오류들에 대한 경계, 그리고 원수의 궤계로 말미암은 온갖 유인책으로부터 신실한 자들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가르침 등이 이어진다. 이 모든 주제들 가운데, 특히 그 첫째는 주님의 위격에 속한 영광에 대한 것이다. 이상은 서신서들의 내용이다.

끝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바쳐진 증거를 변질시키고 손상시키려는 악을(또는 악한 자를) 폭로하는, 그리고 완전히 발전되면 심판으로 끝이 날 예언들을 발견한다. 이 예언들은 또한 어린 양, 곧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의 파멸로 끝이 날, 하나님의 심판의 전개와 그러한 심판에 이어질 영광과 축복을 계시해준다. 이 마지막 주제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계시를 기독교의 가르침과 서로 연결시킨다. 이 주제는 주로 요한계시록에서 발전되지만, 여러 서신들에서 교회의 부패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생생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징들을 드러내는 사복음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 주님의 생애에 대한 기사를 보여주고, 주님의 행하심을 통해서든 주님의 강론을 통해서든 주님을 우리 마음에 제시해 주는 복음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사복음서는 구속함을 받은 영혼에게, 그들에게 부여된 지성의 정도에 따라, 또 그들의 영적인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를 여러 면에서 소중한 분이 되게 해준다. 비록 주님이 이 땅에서는 겸비한 모습으로6) 나타나셨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이 질그릇 안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것이 합쳐 그리스도의 위격에 속한 영광의 풍부함을 형성하고 있는 그분의 성품들을 통해서 그분을 우리 마음에 계시해 준다.7)

6) 고린도전서 28절과 비교해보라.

7) 사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위격에 속한 영광이란 주제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서신서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여기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 그분의 위격에 속한 영광이란 표현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실 것이란 주제가 들어있지 않다. 사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성령님의 강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성령님은 이 엄청난 비밀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로 알리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따르면,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성취하고, 또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고 또 나타내기 위해서 지상에서 두 가지 이상의 성품을 그 자신 안에 연합시키셔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다니시는 동안 주님이 가지신 실제 본성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주님은 무엇인가 되셔야만했다. 주님은 친히 약속된 참된 종으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봉사를 이루셔야만 했다. 그리고 시편 40(8,9,10), 이사야 494, 5절과 다른 여러 구절들에 기록된 대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기셔야 했다.

수많은 증거들이 다윗의 아들이신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아버지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지상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그렇게 오실 메시아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분은 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란 관계 안에서 이 땅에 서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와 계획에 의하면 그리스도, 곧 메시아 혹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오실 것이며, 또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실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의 후손은 임마누엘, 곧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었다.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이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만 집착함으로써, 자기 민족이 이방 민족 위에 높임을 받는 것만을 기대했다. 자신들의 죄나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조차 없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이러한 메시아의 모습은 사실상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고 있는 예언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게다가 세상이 기대하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모습과도 달랐다.

메시아는 우선 인자가 되셔야만 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즐겨 자신에게 사용하신 칭호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칭호다. 인자는 말씀에 의하면, 인간을 위해서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 즉 인간이 영광 가운데 자신의 몫을 얻도록 정해진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계획에 따라서 인간에게 장차 부여하실 만물의 후사로서 신분을 가리킨다(7:13, 14, 8:5,6, 80:17, 8:30, 31).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정하신 만물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 그분은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인자는 진실로 인류에게 속했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위로가 되는 진리이다! 여자에게 나시고 실제로 또한 참으로 한 인간이 되셨고 또한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시려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에 참여하셨다.

이러한 특성 안에서 주님은 고난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셔야 했는데, 이는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태에서 만물을 상속받기 위한 것이었다. 인자이신 주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는데, 이는 유업이 더럽혀졌고 또 인간이 반역 중에 있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후사들이 다른 이들과 같이 범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시며, 인자이시며, 따라서 이 땅에서 진실로 한 인간이시며, 율법 아래 나시고 여자에게서 나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나시고 다윗 가문의 모든 권리를 물려 받을 후사이시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인간의 운명도 물려받으실 후사이시긴 하지만, 우선 종이시며 또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셔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책임에 있어서 몰락한 인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만 했고, 또한 선지자의 증거를 가진 채 신실한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는 책임을 이루셔야만 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다만 구약성경에서 말한 대로, 인자가 만물을 유업으로 받으리라고 예언하고 있는 직분적인 영광에 불과한 것인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건, 또는 율법이 없는 사람이건 그들이 처한 상태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없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거절당하신 것은 이러한 상태를 말해주는 최악의 증거였다. 그리고 사실 인간은 지상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섭리와 특별한 통치와는 별도로, 무엇보다도 그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간이 범죄했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구속이 필요했다. 누가 이것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정말 구속을 필요로 했다. 천사는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으며,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천사는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사람들 중에 누가 만물의 후사가 되며,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단 말인가? 마땅히 만물을 유업으로 받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만물을 마땅히 소유해야 할 자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이루실 종, 다윗의 아들, 인자, 그리고 구속자가 되셔야 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주이시다.8)

8) 창조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로 언급하지만, 굳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분하자면, 항상 아들 또는 성령님이 하신 일로 돌려진다.

복음서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러한 특성들을 보여주되 교의적인 방식(dogmatic manner)으로가 아니라 (요한복음만이 이러한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다양한 특성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기 위해 주님의 행적을 진술함으로써, 우리 앞에 교리적으로 진술될 경우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주님은 이런 혹은 저런 특성에 따라서 말씀하시며 또한 이런 혹은 저런 특성에 따라서 행동하신다. 이에 우리는 성경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 다양한 지위들에 속한 것을 주님이 친히 이루시는 것을 본다.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한 위격으로 계시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

따라서 진정한 성경적인 의미에 의하면,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물론 그 특성도 그 도덕적인 세부사항을 통해서 더욱 잘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이러한 특성들을 통해서 보다 인격적으로 믿음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이 되신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한 인격체이시다. 하나님이 사용하고자 의도하신 이 소중한 수단에 의해서 예수님과 관계된 진리들은 과거에 진행된 모든 것, 즉 구약의 역사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의 영광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 하에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천상적이고 기독교적 질서 속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천상적인 체제의 교리는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경우보다 한결 뚜렷이 유대교와 구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전 것을 반박함으로써 앞선 것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한편으로는 율법에 복종하는 분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친히 약속을 성취시키는 후손으로서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셨다. 하지만 거절을 당하셨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전에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9)을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조건 없는 약속들(10장 참조)과 및 약속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충만함을 가져다 줄 수 있으셨다. 이와 동시에 상징과 모형들이 성취되고, 율법의 저주가 집행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겸비와 관련된 예언들이 성취되고, 그리고 영혼들과 하나님 - 성육신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위격에 부속된 - 과의 관계가 구속주이신 주님이 차지하고 있는 하늘에 있는 위치와 연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문이 이방인에게 열렸으며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이 충만히 드러나게 되었다. 육체를 따라서는 다윗의 아들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우리 주님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견고케 하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할례의 수종자이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나신 자이시며, 자신의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데, 이는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기 위함이다.

9)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것 가운데서, 인간이 한 첫 번째 행위가 그것을 파괴한 것임을 주목하는 일은 엄숙하면서도 교훈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첫 번째가 되고자 했다. 그 다음 세상의 새로운 머리였던 노아가 있다. 노아는 만취했다. 그 다음은 율법을 받을 때, 그들은 황금 송아지를 숭배했다. 제사장은 첫째 날 다른 불을 드렸다. 솔로몬은 우상숭배자가 되었고,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다.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만들었고, 참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했다.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오셨지만 유대교 체계는 타락했다. 따라서 교회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은 둘째 아담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위격에 합당한 만물의 새로운 질서, 앞선 모든 것을 인침

만물의 새로운 질서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그에 앞선 모든 지상적인 질서 위에 더욱 뛰어나고 더욱 높아졌다. 그 영광은 이제 주님 자신의 위격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화롭게 된 사람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었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그에 앞선 모든 것을 인치되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 본래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인쳤다. 이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존재했던 체제와 관련해서 이 땅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처음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에 계시되신 그리스도

앞의 세 복음서는 책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주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적이고 영원한 속성을 제시해 주는데,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주님을 거절함으로써 그 마음이 굳어지고 이로 인해 거절을 당하는 모습과 세상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요컨대 요한복음에는 유효하고 주권적인 은혜와 거듭남, 그리고 천상적인 것들의 기초인 십자가 등이 충만히 드러나 있다.

 

신약 성경 제2판 개정판 서문(1871)

초판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몇 가지만 따로 따로 출판되었으며, (같은 교회에 보내는 두 개의 서신이 있는 경우에는 함께 출판되었고) 다른 것들 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은 몇 개의 신약성경은 재출간되었는데, 금방 소진되곤 했다. 이제 신약성경 전권을 수록한 제2판을 좀 더 보기 좋은 형태로 새로이 편집을 해서 출판하고자 한다.

나는 학술적인 작품을 내려는 뜻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러 책들과 다양한 정보의 출처들을 연구해보니, 많은 성경학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것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나의 연구의 열매로써, 내가 모은 풍성한 자료들을 그들에게 제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그 결과 그들은 가능한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길 바랬다.

초판에서 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의 토대가 되었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 한 독일어 교본과 대부분 편집비평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리스바흐Griesbach, 라흐만Lachmann, 티셴도르프Tischendorf와 기타 몇 명 등이 채택하고 있는 다양한 독법 모음집a collection of the various readings을 참조했다. 하지만 공인 본문은 그 본문이 자주 변경되었고, 해서 나는 이러한 몇 가지 변화를 무시하기로 했다. 나의 계획은, 주요한 비평가들이 동의하는 선에서 그들의 독법을 채택하고, 나의 번역본에 그 변화를 반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목적은 더 정확한 번역본을 얻는 것이었다. 모든 총명한 비평가들이 사본 상의 실수라고 주장하는 것을 번역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공인본문(TR)은 실제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거기서 나온 영어 번역본도 없었다. 다만 몇 년 정도 앞선 초기 번역본에 불과했다. 비평가들은 대부분 표준 본문을 초기 판본들에 약간의 이형variations을 포함하여 다시 출간한 재판reprint으로 보았다. 초기 헬라어 판본 가운데에는 1550년 스테파누스Stephanus 헬라어 신약성경이 가장 유명하다. 이외에 에라스무스Erasmus 성경과 베자Beza 성경이 있다. 에라스무스 성경이 먼저 출간되었다. 콤플루툼 대조성경Complutensian Polyglot이 처음 인쇄되었고, 이어서 스테파누스 신약성경이, 그리고 나서 베자 성경이 인쇄되었다. 엘지비어Elzevirs 성경은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서문에 사용된 “textus ab omnibus receptus”란 표현 가운데 ‘textus receptus’ 또는 received text란 표현이 그대로 성경 이름이 되었다. 따라서 권위역The Authorised Version은 주로 스테파누스 또는 베자 성경의 원문을 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스크리브너Scrivener가 쓴 신약성경 비평입문이란 책의 서문 전체를 읽어보거나 아니면 다른 입문서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서 옥스퍼드의 펠Fell이 쓴 책을 시작으로, 다양한 본문 비평서들을 참고하라. Mill, 벵겔Bengel, 웨스타인Westein, 그리스바흐Griesbach, 마테이Matthei, 라흐만Lachmann, 숄츠Scholz, 티셴도르프Tischendorf, 그리고 최근 인물로 트레겔레스Tregelles가 쓴 책을 참고하라. 나는 여기서 비평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만 거론했다. 이외에도 유명한 주석가들에는 마이어Meyer, 드 베테De Wette, 그리고 알포드Alford가 있다.

초판에서 나의 번역은 그리스바흐, 라흐만, 숄츠, 그리고 티셴도르프 등과 동일한 목소리를 내었다. 우선적으로 냉철한 판단과 비평 감각 그리고 분별력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다. 그 다음엔 가장 초기 사본MSS만을 수용하는 엄격성을 고수하면서, 하나 또는 두 개 정도의 사본만을 참고했다. 세 번째로 과도하게 조심성 없이 인쇄되었어도,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탄 MSS를 하나의 규칙처럼 사용했는가를 고려했다.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전문성과 성실한 연구를 통해서, 처음엔 다소 급진적인 변화를 보였지만, 그 다음 판에서는 처음에 무시했던 것을 더욱 세밀하게 보완했다. 그들도 동의했지만, 그들 모두가 거절했던 것은 사본상 단순한 실수였음이 분명해졌다. 영국의 한 강의실에서 숄츠는 자신의 체계를 버렸고, 새로운 판에선 자신이 거부했던 알렉산드리안 독법Alexandrian readings을 채택하겠노라고 밝혔다. 트레겔레스가 그것을 하나의 확정된 규칙으로 제시한 후부터는, 그런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네 명의 위대한 현대 본문 비평가들의 분별 위에 번역이 이루어졌던 나의 초판 새번역 성경이 출판된 이후, 수용 본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다만 참 독법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시나이 사본Sinaitic MS이 발견되었다. 바티칸Vatican 성경이 출간되었고, 티셴도르프의 the Monumenta Sacra Inedita에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그리고 대부분 일반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과 기타 성경을 수록한 포피리Porphyry 성경이 출간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알포드와 마이어, (본문 검증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드 베테의 것과 함께 대부분 새로운 재료들을 담고 있었다. 나의 제2판이 완성되었긴 했지만, 아직 인쇄되지 않은 상태에서 트레겔레스의 것이 전체적으로 출간되었다.

이 모두는 더 많은 수고를 필요로 했다. 나는 숄츠를 상당 부분 배제했다. (그의 작품은 신중한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대신 티셴도르프의 제 7판과 알포드, 마이어, 드 베테를 수용했다. 나는 모든 의심스러운 부분을 시나이 사본the Sinaitic, 바티칸 사본Vatican, 더블린 사본Dublin, 알렉산드리안 사본Alexandiran, 코덱스 베자Codex Beza, 코덱스 에프라임Codex Ephraemi, 세인트 갈 사본St. Gall, 클라로몬타너스 사본Claromontanus, 사도행전은 헤르네스 라우드 사본Hearne’s Laud, 대부분은 포피리 사본Porphyry, 벌게이트 역본Vulgate, 사바티에Sabatier와 비안치니Bianchini에 수록된 옛 라틴어 사본과 비교했다. 나머지는 시리아 역본the Syriac을 참고했다. 그래서 내가 남겨두었거나 삽입한 단어와 문장은 모두 시리아 역본에서 가져왔다. 나는 시리아 학파는 아니지만, 그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누가복음은 자킨티우스 사본Zacynthius을 참고했는데, 자킨티우스 사본은 가끔 스테파누스, 베자, 에라스무스의 주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작품에는 개인적으로 사본들을 일일이 참고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헌신적인 수고가 배어있기 마련이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몇 개의 본문은 더 분명해졌고,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생긴 약간의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은 수정되었다. 헬라어는 동일하지만 가끔 단어와 구의 불일치성이 허용되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은 나에게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정확하게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본문 비평을 상세히 다루는 과정에 많은 수고가 들어갔긴 해도, 영적인 꼴은 별로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대한 열매를 얻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좀 더 정확한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내가 거명했던 편집자들은 시나이 사본이나 포피리 사본Porphyrian MSS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이러한 권위자들이 현안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인지, 또는 문제가 될 만한 곳에서 내가 어느 쪽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과연 그들이 문제 해결을 해줄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나는 이제 이러한 권위자들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본문의 일반적인 확실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모든 연구는 그 사실만을 입증할 뿐이었다. 성직자들의 간섭은 문제시 되는 독법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부분적으론 고의적이고, 부분적으론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복음서를 통일시키려는 시도는 고의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성직자의 봉사를 끌어내는 것은 더욱 무지에 속한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예수가 들어가는 자리에, 대신 그가라는 단어를 넣음으로써 성직자의 역할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에 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사본을 필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본문에 예수란 단어가 다시 삽입된다. 누가복음에 있는 주의 기도문을 마태복음에 있는 것과 같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사례다. 만일 우리가 알포드와 대부분 편집자들을 믿어야 한다면,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 그리고 몇 개의 사본에 나오는 장자first-born’란 단어를 제거해야 한다. (나는 이에 대해 이것이 가장 오래된 사본MSS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란 점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마치 우리 주님의 모친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예들이 몇 개 있다. 다른 사본MSS과 번역본들은, 약간 주의를 기울이면, 이런 경우의 실제적인 상황을 명확히 해준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만큼 초기에 해당하는 사본은 없다. 그렇다면 적절한 비교와 내적 증거를 저울질해보지도 않고, 그저 가장 오래된 사본만을 권위로 삼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추측만으론 신뢰받을 수 없다. 확실한 증거를 여러 가지 사실로서 저울질해보는 것은 어림짐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 가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디모데전서 316, 요한복음 8장 초반부, 그리고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몇 개의 구절들이다. 초판에서 나는, 많은 비평가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논문을 썼기 때문에 아무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요한복음 8장 초반부에 대해서, 나는 그 진위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그것이 다소 신뢰하기 힘든 사본에는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도덕성에 해롭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본문을 검토해보는 과정에서 나는 옛 라틴어의 최고의 사본 가운데 하나에서, 2페이지 가량이 찢겨나간 것을 발견했다. 본문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본문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유실되었던 것이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서로 다른 형태의 본문을 이어놓은 것 같은 이유에 대해서, 나는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주님의 생애에 대한 두 가지 별개의 결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마태복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태복음엔 주의 승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마태복음의 전반적인 특징을 부여한다. 그리고 베다니에선 주께서 승천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이룬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땅 끝까지 이방인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누가복음은 하늘에서 오신 성령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하나는 메시아적 소망이,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 소망이 주요 내용이다. 이제 마가복음을 보자. 마가복음 161-8절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의 스토리를 제공한다. 9절부터 베다니 사건과 승천 장면, 그리고 몇 가지 사실들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스토리를 제공한다. 이는 다른 부분이며, 일종의 부록이다.

나는 공인본문the Textus Receptus이 에라스무스 헬라어 성경과는 별개라는 점을 난외주에서 언급했는데, 요한계시록이 없는 에라스무스 헬라어 성경은 허술하고 또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사본에서 번역되었다. 에라스무스 성경은 하나의 주석서가 첨부되었으나, 한 필사자에 의해서 따로 분리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벌게이트 성경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는 일을 했으며, 벌게이트 성경에 없는 부분은 짐작해서 번역했다. 이 사실을 인용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어느 비평가도 사본 현상을 실제로 설명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방대한 사본들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떤 것은 너무 오래 되었고,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현대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시나이Sinaitic 사본과 바티칸Vatican 사본처럼 매우 오래된 것은 성직자의 손을 탄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변질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또 교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쉽게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모든 연구를 마친 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별개의 독법을 주장하는 두 개의 학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사본도 학파에 따라서 다른 부분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바흐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약자로 A)는 기존 성경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복음서는 콘스탄티노폴리탄을, 서신서는 알렉산드리안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에 나는 포피리 사본(약자로 P)에서, 사도행전 여섯 개 또는 여덟 개의 장이 공인본문과 일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후론 거의 참고하질 않았고, 바울 서신서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두 개의 학파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시나이 사본(약자로 א), 바티칸 사본(약자로 B), 그리고 더블린 사본(약자로 Z)은 가장 완벽한 예들examples이다. 이 사본들은 각자 개별적인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이 가운데 약자로 Z로 표기되는 더블린 사본은 가장 정확한 사본이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나는 언급했다. 사본으로서 바티칸 사본은 시나이 사본보다 낫긴 하지만, 바티칸 사본이 정확한 사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바티칸 사본의 요한계시록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소유한 가장 오래된 사본이면서 우리에게 전체 신약성경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모든 성경사본들을 없애버린 이후, 이때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소위,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약자로 A)은 알렉산드리아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스크리브너를 신뢰할 수 있다면, 페쉬토 시리아Peschito Syriac 신약성경은 B보다는 A와 더 일치한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느 사본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다. 1세기 끝이나 아니면 2세기를 시작하는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점은 오래된 라틴어 사본과는 상황이 또 다르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대해선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라틴어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근접해있다. 바로 여기에 하나의 현상이 있다. 고대 사본 가운데 브릭시아누스Brixianus는 공인본문과 일치한다. 나는 하나의 예외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벌게이트 성경은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항상 따르고 있진 않지만, 상당 부분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본들을 이렇게 분류할 수 있다. א, B, Z, L이다. L은 상당히 반복해서 B를 따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A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언셜체(4-8세기의 둥근 대문자 필사체)로 된 긴 리스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알포드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당신은 ‘A, &c.’를 보게 된다.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사본들이 또 다른 부류를 형성하는데, Z가 여기에 해당되며, C는 별개의 그룹을 이루고, P는 주로 서신서들에서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따르며, 흔하진 않지만 T RA를 따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사도행전에선, 내가 조사해본 결과, T R Δ, 또는 St. Gall을 따르며, 자주 T R을 추종하지만, 많은 점에서 독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일 사복음서에서 AB가 일치하고 있다면, 우리는 웬만하면, 다른 증거들을 충분히 살폈다는 가정 하에, 그 독법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D는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많이 일치하고 있지만, 독특한 특징이 있다. 나에게 그 결과는, 전체 본문에 대해서 불확실한 것은 전혀 없으며, 몇 가지 경우엔 의심이 일어나긴 하지만, 사본의 역사를 통해선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역사 속에서 어느 사본이 원본과 100% 일치하고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사본 현상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본문 비평과 사본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언급했다. 이 일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결론을 내는 것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티셴도르프의 영어 신약성경과 같은 책은, 내 생각엔 해롭다. 당신은 그 영어성경을 보면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며, א, B, A의 아래쪽에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해서 의심하는 내용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만, A의 서신서 독법은 복음서 독법과는 중요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되었다. 이 대부분의 경우에, 티셴도르프는 자신이 참된 독법을 하고 있다고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나는 최고 권위자들이 조사한 바를 따랐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차이점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신은 한쪽엔 א, B, L 또는 B, L 그리고 다른 쪽엔 A, &c를 가지고 있다. 고백하건데, 나는 B, L이 옳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진 않다.

다음으로 독자는 권위역the Authorised Version의 개정판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최선의 지식을 통해서 볼 때, 권위역은 최고의 헬라어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이다. 나는 권위역의 무수히 많은 구절들이 새 번역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확언하고 싶다. 우리 마음이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새 번역본도 가능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내겐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성직자들이 따로 사용할 용도로 권위역의 개정판을 내는 것은, (내 판단으론)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권위역을 개정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새것이 옛것만 못할 뿐만 아니라 나란히 놓고 보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볼 수 있다. 모조품은 좋은 맛을 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모조품엔 본질적인 부분이 부족하며,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본질은 좋은 맛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나는 필요한 모든 도움을 활용했다. 문법책과 사전 등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든 책에 활용가능한 일반적인 것을 사용했다. 나는 마이어Meyer를 사용했으나, 그의 후속작은 매우 열악했다. 그 외 나머지 부분은 알포드Alford의 것을 사용했다. 알포드 뿐만 아니라 드 베테의 것도 참고했다. 엘리엇의 것은 매우 훌륭했다. 키프케의 것 또한 매우 유용했다. 나는 헬라어 본문 석의for the exegesis of the text as Greek를 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했으며, 어느 경우에도 교리적인 해석은 참고하지 않았다. 프리체Fritzsche의 것은 문법적으로 풍성한 예화를 제공했다. 블릭Bleek이 쓴 히브리서에 대한 책은 공부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델리츠Delitzsch와 다른 사람들의 책을 가끔 참조했다. 역사를 다룬 책들 가운데 쿠이오엘Kuinnoel의 책이 있다. 하지만 매우 가치 있는 책은 찾지 못했다. 칼빈의 책도 기대만큼 수준이 높지 않았다. 벵겔Bengel, 해먼드Hammond, 엘슬리Elsley가 있고, 월프Wolff와 기타 독일 저자들이 있다. 그리고 스탠리Stanely, 조벳Jowett, 이디Eadie 등이 있다. 후자를 참고하긴 했지만, 여러 번 참고할 정도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추구했던 것은 본문 자체에 대한 연구였지, 그들의 견해를 참고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푸울Poole의 개요와 블룸필드Bloomfield는 옛날 주석가들에게 요긴했던 책들이다.

번역본 중에, 디오다티Diodati의 이탈리아 성경은 오래된 성경 가운데 최고이며, 그 다음이 네덜란드어 성경이고, 그 다음이 영어 성경이다. 벵겔의 독일어 성경은 매우 훌륭하고, 비록 그들의 교리로 오염되어 있긴 하지만, 매우 문자적인 번역본으로 벌리버거Berleburger 성경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기타 번역본들에는 Kistemaker, Gossner, Van Ess 등이 있는데, 모두 로마 가톨릭 성경이다. 마이어의 루터 성경, 피스카토르의 스위스 성경이 있는데, 이 피스카토르 성경은 루터 성경보다 더 낫다. 이 두 개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나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 가운데, 디오다티 번역본은 문자적으로 번역되었긴 해도, 프랑스어 성경 같지가 않다. 마틴Martin과 오스터발드Ostervald 번역본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르노Arnaud 번역본은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루터의 번역본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부정확한 번역본이다. 이 외에, 라틴어 번역본인 벌게이트Vulgate 성경과 베자Beza 성경이 있다. 드 베테의 독일어 성경은 문체가 우아하긴 해도, 조동사를 과도하게 배제시키고 있는데, 그 점이 독일어에 영향을 미쳤다. 구약성경을 보면, 그는 훌륭한 히브리어 학자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원칙을 결여하고 있다. 그의 이사야서는 게제니우스Gesenious의 것이다.

나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받긴 했지만, 번역은 어느 누구의 것도 참고하지 않았다. 새 번역은 순전히 나의 번역이며,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가능한 거의 모든 사본과 번역본 성경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다. 나는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 즉 성령을 통해서 받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했지만, 그럼에도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작품이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이며 또한 찬송 받으실 주님을 계시하는 책으로서, 단 한 순간도 신적인 특징을 멈춘 적이 없는 신성한 책이다. 이러한 것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경의 가치인 것이다.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신성하기에,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면서, 여전히 인간적인 요소도 있기에 사람에게 온전히 그리고 신성하게 적합하다. 새 번역 성경을 번역한 나의 의도는 순전히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가능한 원어에 가까운 말씀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공적인 사용을 위해 새로운 버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물론 공적인 목적에 맞게 그리 하면 된다. 나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원어를 읽을 수 없는 성경학도들에게, 가능한 원어에 가까운 영어 번역본을 제공하는 것이었음을 밝혀둔다.

JND


번역 후기의 글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의 새번역 신약성경The Holy Scriptures : A New Translation from the Original Language by J. N. Darby 1871을 우리 말로 출판하게 되어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다비의 새번역 신약성경(이하 다비역)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다비는 우선적으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이 독일어 성경은 원전에 따른 충실한 번역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엘버펠더 성경Elberfelder Bible입니다. 엘버펠더 성경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1851년 줄리어스 안톤 폰 포섹J A von Poseck이 이미 서신서 일부를 번역했고, 이 번역 원고를 검토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영국에 있는 J. N. 다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854년 다비가 독일에 갔을 때, 폰 포섹 그리고 칼 브록하우스Carl Brockhaus와 더불어 번역하는 일을 착수했습니다. 처음 그들은 서신서만을 번역하고자 했지만, 결국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어느 부분을 감당했는지 말하긴 어렵다고 합니다. 전체 독일어 신약성경이 1855년 최초로 브록하우스에 의해서 출판되었고, 이후로 몇 번에 걸쳐서 재판되었는데, 다비는 아마도 처음 네 번의 개정작업에는 참여한 듯 보입니다.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개정 작업에 참여했는데, 주로 루돌프 브록하우스Rudolf Brockhaus와 에밀 동게스Emil Donges가 담당했습니다.

그 당시 다비는 영어 성경을 새롭게 번역할 필요를 느끼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킹 제임스 성경(KJV)을 훌륭한 번역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형제단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계속 사용하도록 격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는 신약성경을 더욱 문자적으로 번역한 영어 버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게 된 신약성경은 1865년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처음엔 부분적으로 출판되었지만, 1867년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다비역은, 그리스 원전에 대한 현대 비평 본문modern critical editions of the Greek text을 반영한 매우 문자적인 번역본이며, 풍성한 본문 비평과 언어학적인 주석과 설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881년 영어 개역 버전(RV)에 참여했던 번역자들은 이 다비역을 참조했습니다. F. F. 브루스가 쓴 영어 성경의 역사History of the Bible in English(제3판, 132쪽, 1978년 발행)란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은 J. N. 다비, 칼 브록하우스, 그리고 헤르마누스 코렐리우스 부어호브Hermannus Cornelius Voorhoeve가 번역했는데, 번역작업은 1869년에 시작했고, 1871년에 마치게 되었으며, 그 때 신구약 전체 성경이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구약성경은 약간씩 몇 번의 개정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다비역은 방대한 사본과 대조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번역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참고한 사본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나이 사본(Sinaiticus, 사본보관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리안 사본(Alexandrinus, 런던), 바티칸 사본(Vaticanus, 로마), 바실리아누스 사본(basilianus, 로마), 에브라임 사본(Ephraemi, 파리), 베자 사본(Beza, 케임브리지), 클라로몬타누스 사본(Claromontanus, 파리), 바실레넨시스 사본(Basileensis, 바젤), 라우디아누스 사본(Laudianus, 옥스퍼드), 상게르마넨시스 사본(Sangermanensis, 상트페테르부르크), 보렐리스 사본(Boreelis, 위트레흐트), 오기엔수스 사본(Augiensus, 케임브리지), 코이슬리니아누스 사본(Coislinianus, 파리), 할레이니아누스 사본(Harleianus, 런던), 페트로폴리타넘 사본(Petropolitanum, 드레스덴), 부에르네리아누스 사본(Boernerianus, 드레스덴), 함부르크시스 사본(Hamburgensis, 함부르크), 무티넨시스 사본(Mutinensis, 모데나), 코이스리니아누스 사본(Coislinianus, 파리), 페트로폴리타누스 사본(Petropolitanus, 상트페테르부르크), 니트리엔스 사본(Nitriense, 런던), 키프러스 사본(Cyprius, 파리), 모스크엔시스 K(E) 사본(Mosquensis, 모스크바), 레기우스 사본(Regius, 파리), 앵글리칸-로마 사본(Angelicus-Romanus, 로마), 캠피아누스 사본(Campianus, 파리), 우펜바키아 사본(Ruber or Uffenbachianus, 함부르크 & 런던), 퍼퓨리우스 사본, 모스크엔시스 O 사본(Mosquensis, 모스크바), 다양한 필사본(Various Codices), 겔퍼비스타누스 A 사본(Guelpherbystanus A, 울펜버튼), 포피리아누스 사본(Porphyrianus, 상트페테르부르크), 겔퍼비스타누스 B 사본(Guelpherbystanus B, 울펜버튼), 니트리엔시스 사본(Nitriensis, 런던), 바티칸 354 사본(Vaticanus 354, 런던), 보르기아누스 & 페트로폴리타누스 사본(Borgianus and Petropolitanus, 로마 & 상트페테르부르크), 나니아누스 사본(Nanianus, 베니스), 모스크엔시스 사본(Mosquensis, 모스크바), 다양한 필사본(Various Codices), 모나센시스 V 사본(Monacensis, 뮌헨), 바르베리니 사본(Barberini, 로마), 더블린 사본(Dublinensis, 더블린), 티셴도르프 사본(Tischendorflanus, 옥스퍼드 & 상트페테르부르크), 상갈로 사본(Sangallensis, 생갈), 옥소니엔시스 사본(Oxoniensis, 옥스퍼드), 자킨토스 사본(Zacynthius, 런던), 로사노 사본(Rossanensis, 로사노) 등등.

이처럼 다비역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본들을 대조해서 번역한 성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방대한 양의 사본을 참조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사본들과의 불일치가 있을 경우 좀 더 오래된 사본이 원본에 가깝기 때문에 좀 더 원어에 가까운 말씀으로 번역하기 위한 노고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원칙도 없이 그저 더 오래된 사본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비역의 난외주에는 특정 구절에 대해서 다양한 번역본들과의 비교를 각주로 달고 있고, 킹제임스성경(TR)과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자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킹제임스성경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다비역과 비교해보니 다비역이 더 우수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다비역 성경의 차이점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을 계시하고 있으며, 이제 누구라도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으려면 우선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이며 영적인 출생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출생한 갓난 아기이며(벧전 2:2),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을 계시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계시하는 책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계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다비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로 번역하고 있고, KJV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로 번역하고 있기에, 다비역이 더 우수한 번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 다비역
요 1:12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으니,

영어 다비역(DBY)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right to be children of God, to those that believe on his name;

영어 킹제임스역(KJV)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power to become th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이제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비밀의 경륜을 계시로 받았으며, 그 내용인즉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지위와 권세를 얻게 되었음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을 보면, 다비역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삼으신 놀라운 사실을 그대로 번역하고 있는 반면, KJV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하셨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KJV의 번역은 원본에도 없는 children이란 단어를 삽입해서, 하나님이 자녀로 입양하셨다는 의미로 번역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으시는 진리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인 비밀의 경륜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머물지 않고, 그보다 더욱 진전된 계시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놀라운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다비역이 더 우수한 번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 다비역
엡 1:5 그분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 삼고자 미리 우리를 구별하셨으니,

영어 다비역(DBY)
having marked us out beforehand for adoption through Jesus Christ to himself,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영어 킹제임스역(KJV)
Having predestinated us unto the adoption of children by Jesus Christ to himself,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이제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까지 참여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사람들은 죽어 있는 상태에서 선택받은 사람만 부활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었고,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모든 사람들의 복된 소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이러한 소망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글 다비역
빌 3:11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영어 다비역(DBY)
3:11 if any way I arrive at the resurrection from among {the} dead.

영어 킹제임스역(KJV)
3:11 If by any means I might attain unto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다비역은 이처럼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의 휴거의 소망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the resurrection from among the dead.로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 반면, KJV는 구약시대 성도들의 소망이었던 모든 죽었던 사람들이 한번에 부활하는 대부활로서 죽은 자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dead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구약시대엔 계시된 적이 없는 신약시대의 새로운 계시였고(막 9:10 참고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복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 해방의 진리입니다. 영적 해방의 진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소개되고 있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거듭난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화의 삶을 살려면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가 더 있습니다. 거듭남과 죄사함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우리 속에 여전히 옛 본성, 옛 성품, 그리고 죄성(sin)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도 성화의 삶을 살아내고자 고군분투하며, 많은 고뇌와 영적 싸움 끝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에야 겨우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로마서 7장 24절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해방시켜(who shall deliver me)줄 것인가?”(롬 7:24)

바로 여기서 해방(deliverance, deliver)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해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게 될 때, 자아와 육신과 죄의 법과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영적인 실제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한글개역성경과 한글 킹제임스성경은 이 단어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 해방의 진리는 골로새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즉 “그분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고(Who hath delivered us),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왕국으로 우리를 옮기셨으니”(골 1: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글개역개정성경과 한글 킹제임스성경은 이처럼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는 구절을 번역해내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번역된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참고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 주님의 오심과 관련해서 사용된 그리스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파루시아, 에피파네이아, 아포칼립시스입니다. 다비역을 보면, 파루시아는 the Coming of Christ, 에피파네이아는 the appearing of Christ, 아포칼립시스는 the revelation of Christ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각각의 단어가 신약성경 어디에서, 어느 자리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 다비역
고전 1:7 이로써 너희가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밝히 드러나실 것을 기다림이니,

영어 다비역(DBY)
1:7 so that ye come short in no gift, awaiting the revel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영어 킹제임스역(KJV)
1:7 So that ye come behind in no gift; waiting for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따라서 한글 다비역에서는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가리키는 the revelation of Christ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나실 것, 또는 밝히 드러나시는 날로 번역했습니다.

한글 다비역
살전 1:7 괴로움을 당한 너희에게는, 주 예수께서 그분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밝히 드러나시는 날, 우리와 함께 안식하게 하시고,

영어 다비역(DBY)
1:7 and to you that are troubled repose with us, at the revelation of the Lord Jesus from heaven, with {the} angels of his power,

영어 킹제임스역(KJV)
1:7 And to you who are troubled rest with us, when the Lord Jesus shall be revealed from heaven with his mighty angels,

한글 다비역
벧전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나시는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라.

영어 다비역(DBY)
1:7 be found to praise and glory and honour in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영어 킹제임스역(KJV)
1:7 might be found unto praise and honour and glory at the appearing of Jesus Christ:

이어서 살펴볼 단어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영어에서 people이란 단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백성으로 번역했습니다. 반면 nation이란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에쓰네”인데, 단수로 사용될 때에는 민족으로 번역되지만, 복수로 사용될 때에는 이방인들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비역은 “에쓰네”란 단어를 일괄적으로 nations으로 번역했지만, KJV는 gentiles, heathen, nations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다비역을 번역하면서, 한글개역개정과 대조하면서 기존 단어의 뜻을 유지하면서도 통일성을 기하고자, nation은 민족으로, 정관사 없는 nations(롬 15:10, 고전 1:23, 계 10:11)와 정관사 있는 the nations는 이방인들로, all nations(계 14:8, 15:4)는 모든 나라로, all the nations는 모든 민족들로 번역했습니다. 이 점을 참고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비역에는 신약성경 중 세 구절(마 23:14, 행 8:37, 15:34)이 없습니다. 이에 역자는 (없음)으로 표기하였습니다. 반면 KJV에는 이 세 구절이 모두 있습니다. 원본은 없고, 사본들 간의 차이점은 상존하는 상황에서 어느 것이 맞다고 말할 순 없지만, 오래 된 그리스어 사본에는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본 필사의 오류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는 만큼, 이런 점에 대해서 충분한 고민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결론적으로 다비역이 이 세 개의 구절을 없음으로 표기한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울러 이 다비역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기도로 동역해주시고, 격려하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구절과 단어까지 여러 성경들과 비교하면서 감수하는 수고와 고통으로 함께 해주신 원당교회 박건신 목회자님과 서울북부교회 윤영성 목회자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무쪼록 이 다비역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보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말씀의 일꾼으로 섬기고자 하는 모든 분들의 손에 올려드리오니,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작은 자의 섬김과 봉사가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역자 이종수

 

목차

신약성경에 대한 서문5

신약성경 제2판 개정판 서문(1871)29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프롤로그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일컬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카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부직을 1827년에 사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벨렛(J.G. Bellett), 허친슨(F. Hutchinson), 파넬(Lord Congleton-John Parnell), 그로브스(A.N. Groves), 크로닌(E. Cronin), 스토크스(W.J. Stokes) 등 6명의 신앙동지와 함께 성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기성 교계와 결별했다. 이들을 가리켜 세칭 ‘더블린의 7형제’란 부르며, 교회 역사상 ‘형제단 교회’의 시발점이 된다. 이들은 교파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하여 형제와 자매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플리머스 형제단 교회(Plymouth Brethren Assembly)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채프만(R.C. Chapman)이 반스테플에서, 크레익과 조지 뮐러가 브리스톨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뉴톤의 매부이며 저명한 본문 비평가였던 트레겔레스(S.P. Tregelles)가 1836년에 영접되었다.  

다비는 그리스도인의 간증(The Christian witness)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다비의 성경주석(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도 이 무렵 출간되었는데 5권으로 되어있는 이 저서야 말로 성경학자들에 의해 극찬을 받고 있는 불후의 걸작이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유럽 각국어에도 유창해서 그가 번역한 불어 성경은 프랑스 전역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새번역으로 불리는 그의 영어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기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밖에도 독일어, 이태리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논문과 설교는 윌리암 켈리(W. Kelly)가 편집하여 32권으로 집대성했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식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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